김구선생님 댓글에 나온글을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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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premium.chosun.com/site/data/html_dir/2015/09/02/2015090203047.html
김일성의 입을 통해 이 비화가 공개되었을 때 그것은 사실을 과장했고 또 악의가 있었다는 것이 통념으로 받아들여졌다. 김구가 임시정부 주석의 인장을 김일성에게 바쳤다는 그의 발언은 믿을 수가 없다. 김구가 평양에 갈 때 그 직인을 가져갔으나 그것은 남북한의 합의가 이뤄지면 권위 있게 날인하기 위한 것이었지 김일성에게 ‘헌상(獻上)’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과수원 문제는 망명한다거나 구걸의 뜻이 아니라 김구가 자신의 고향도 이북인데 노후에는 통일된 고향에 돌아가 과수원이나 운영하면서 여생을 마치고 싶다는 뜻으로 한 말이었다. 그런데 김정일은 더 나아가 영화 ‘위대한 품’(1986)에서 이 일화들을 과장하여 극화했다. 이 일화는 북한이 남북협상을 정치적으로 어떻게 선전했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다. 이완범 교수(한국학중앙연구원)는 이 대목을 거론하면서 “김구는 김일성·김정일에게 살아서도 이용당하더니 죽어서도 이용당했다”는 글(‘김구, 남북협상, 대한민국 수립’·한국정치외교사학회·2015년 4월 23일·54쪽)을 남겼다.
개인적인 생각
1895년 10월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1896년 2월부터 고종황제가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을 하게된다.
치하포사건은 1896년 3월임
10월- 2월- 3월
나라의 황후가 일본의 양아치 무사들에게 살해되었고 왕이 궁을 버리고 피신을 했던당시에
청년김구가 여점에 있던 스치다조스케를 본다
왜 청년김구는 스치다조스케에게 발차기를 날렸을까
3차례의 진술[공초(供招)]에서 김구는 스치다 살해 동기와 살해 방법을 밝혔는데, 동기는 ‘국모의 원수에 대한 복수’를 하고 나라의 수치를 조금이나마 씻고자 하는 것이며, 방법은 발로 차 마당에 쓰러뜨리니 그가 칼을 뽑기에 돌로 쳐 넘어뜨리고 칼을 빼앗아 죽였다고 주장하였다.
칼을 차고 있었고 수행원인 통역원 임학길이 평양으로 도망하여 신고함
칼도 차고 있고 통역하는 수행원이 있음? 상인이? 1905년도 전입니다
국밥을 늦게줘서 사람을 죽였다고요?
나라를 빼앗고 사람을 죽인다면요? 우리나라 왕비를 죽이고 왕을 협박하였다면?
안중근의사님을 총을 쏴서 일본인을 죽인 테러리스트 살인자라고 하실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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